옛글

운초 김부용의 삶과 사랑

몽블랑* 2013. 10. 1. 12:47

여류시인 운초 김부용의 삶과 사랑  

2007년 3월에 마눌님과 둘이서 천안에서 대전으로 내려가는 길에 우연히 천안 광덕산(태화산)에 들렸다. 우리나라 최초 호두나무를 식재한 곳이라는 말을 듣고 안가본 곳이라 방문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호두나무와 광덕사 경내를 둘러보고 다른 길로 내려오는데 표지판에서 내 발걸음이 멈춰졌다. 다름아닌여류시인 운초 김부용....이란 철제 표지판을 보고~~~

당시엔 카메라를 지참하지 않아서 눈으로만 이러저리 훑어보고 돌아왔다. 그뒤에인터넷 검색에서 유명한 기생이자 시인이었단 글을 접하고 직접 김부용 묘소를 눈으로 확인할 기회를 엿보다가 며칠전 회사에서 일찍 나오면서 광덕산으로 향하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김부용에 관한 것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오르내리며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광덕사 김부용 묘소 가는 길엔 새하얀 광대수염, 애기똥풀, 가시엉겅퀴, 찔레꽃등이 참 많았다. 김부용무덤과바로 뒤에 김이양대감의 묘를 보니 죽어서도 같이 있고 싶어한 김부용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고향은 평안도 성천, 시명(詩名)은 운초(雲楚). 이름은 김부용(金芙容)이다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 그리고 운초 김부용을 조선 시대를 통털어 시 잘 짓고 노래 잘하는 조선의 3대 명기라고 칭한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읍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이 멋진말은 조선시대 순조임금때 1820년~1869년까지 한 세상을 살다간 여류시인으로 유명한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容)이 남긴 말이다.

김부용(金芙蓉)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여간한 문재가 아니였던 모양이다.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으니,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고 하는 부용은 한번 배우면 둘을 깨우칠 만큼 영특하였고, 용모도 몹시 고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고 한다. 열두살에 기적에 오르고, 열다섯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풍류객이 찾아와 재기를 칭찬하고, 수령의 수청을 독차지해 동료 기생의 시샘을 받았다. 열아홉살이 되었을때 운초에게 일생의 전환기가 왔으니 성천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 온 것이다. 그는 정사에만 힘쓰는 명관(名官)으로 운초의 특출한 용모와 재색을 아껴 자기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소개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보아서 요즈음의 성상납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터이다. 선천부사쯤이야 하루아침에 목을 뎅겅 날려버릴 만한 권세를 가진 것이 평양감사라는 요직이고 매관 매직이 판을 치던 시대이니만치 자기출세를 위해서 기생을 바쳤다는게 적당한 표현이다.

김부용의 인생의 전부에는 김이양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젊었을때 몹시도 가난하여 굶기를 밥먹듯하였다. 하루는 저녘도 못 먹고 굶고 자는데, 도둑이 들어 쌀이 없자 부뚜막을 헐고 솥을 떼어가는 소리가 났다. 부인이 남편을 깨워 살림살이의 전부인 솥을 가져 간다고 하자

김이양은, `오죽 가난하면 남의 집솥을 떼어가겠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인 것 같으니 내버려 둡시다` 하였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도둑은 크게 깨달아 솥을 그냥 두고 갔으며, 그 후로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옥당 학사(玉堂學士)로 있을때 은혜를 갚고자 찾아와 둘은 그 후 백년지기처럼 친하게 지냈다하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남긴 사람이다.

그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은 호가 연천(淵泉)으로,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거쳐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그 때 성천부사로 부임해온 사또가 있었는데 신임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운초를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을 소개하였는데, 그때 김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부용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고 하는데 천거에 대해 김이양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김이양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끔찍히 사랑하였고, 부용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두사람은 비록 김대감이 나이가 들어 남자 구실은 못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정답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생이별을 한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이 시가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別 ...........................思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雁書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依孤枕驚殘夢 ....................望歸雲 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 ................容貌憔悴把鏡下淚 ................歌聲鳴咽對人含悲 ................銀刀斷弱腸非難事 ................珠履送遠眸更多疑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이별하옵니다 (別) 그립습니다 (思) 길은 멀고 (路遠) 글월은 더디옵니다 (信遲) 생각은 님께 있으나 (念在彼)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身留玆)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紗巾有淚)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雁書無期)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香閣鍾鳴夜)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鍊亭月上時) 이 때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依孤枕驚殘夢)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望歸雲 遠離)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日待佳期愁屈指)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晨開情札泣支 )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容貌憔悴把鏡下淚)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歌聲鳴咽對人含悲)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銀刀斷弱腸非難事)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珠履送遠眸更多疑)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님께서 어찌 그리 신의가 없습니까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라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홍안만 늙어가고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어떠하겠습니까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오직 바라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 강을 건너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지 15년이 되는 1845년 이른 봄 김대감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 김대감은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는데, 이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 라며 다시 못 올 불귀의 객이 되었다.

김부용의 묘소는 천안 광덕사 경내를 지나서 광덕산(태화산)으로 오르다보면 우측 계곡 건너의 양지바른 곳에 있다. 시인 김부용의 묘. 그 신분이 후실이었기로 사랑하는님과 합장의 예우는 받지 못하였지만 지아비로 모시던 그 사람의 바로 아래에 오두마니 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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