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이해인수녀님의 시 몇편

몽블랑* 2013. 10. 1. 08:30


아침/이해인

사랑하는 친구에게 처음 받은 시집의 첫 장을 열듯 오늘도 아침을 엽니다 나에겐 오늘이 새날이듯 당신도 언제나 새사람이고 당신을 느끼는 내 마음도 언제나 새마음입니다 처음으로 당신을 만났던 날의 설레임으로 나의 하루는 눈을 뜨고 나는 당신을 향해 출렁이는 안타까운 강입니다.

바람에게/이해인

몸이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날 너는 나의 어여쁜 위안이다, 바람이여 창문을 열면 언제라도 들어와 무더기로 쏟아내는 네 초록빛 웃음에 취해 나는 바람이 될까 근심 속에 저무는 무거운 하루일지라도 자꾸 가라앉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다오 나무들이 많이 사는 숲의 나라로 나를 데려가다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겠다 삶의 절반은 뉘우침뿐이라고 눈물 흘리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묵묵히 하늘을 보여준 그 한 사람을 꼭 만나야겠다.

별을 보며/이해인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일 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 데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병상일기/이해인

이만큼 어른이 되어서도 몹시 아플 땐 '엄마' 하고 불러보는 나의 기도

이유 없이 칭얼대는 아기처럼 아플 땐 웃음 대신 눈물 먼저 삼키는 나약함을 하느님도 이해해주시리라

열꽃 가득한 내 이마를 내가 짚어보는 고즈넉한 오후

잘못한 것만 많이 생각나 마음까지 아프구나

창 밖의 햇살을 끌어다 이불로 덮으며 나 스스로 나의 벗이 되어보는 외롭지만 고마운 시간

아픈 날의 노래/이해인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지만 몸이 아프니 마음도 따라 아프네요

아프다 아프다 아무리 호소해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은 그 아픔 알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당연하니 이해 해야지 하면서도 왜 이리 서운한 걸까요

오래 숨겨 둔 눈물마저 나오려 하는 이 순간 나는 애써 웃으며 하늘의 별을 봅니다

친한 사람들이 많아도 삶의 바다에 서면 결국 외딴 섬인 거라고 고독을 두려워하면 죽어서도 별이 되지 못하는 거라고 열심히 나를 위로하는 별 하나의 엷은 미소

잠시 밝아진 마음으로 나의 아픔을 길들이는데 오래 침묵하던 하느님이 바람 속에 걸어와 나의 손을 잡으십니다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기는 왠지 죄송해서 그냥.... 함께 별을 보자고 했답니다

보고싶다는 말/이해인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오늘은 이 말이 새롭다

보고 싶은데......

비오는 날의 첼로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날의 피아노 소리 같기도 한 너의 목소리

들을 때마다 노래가 되는 말 평생을 들어도 가슴이 뛰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칠맛 나는 네 말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그리움의 바다

보고 싶은데......

나에게도 푸른 파도 밀려오고 내 마음에도 다시 새가 날고......

어느 수채화/이해인

비 오는 날 유리창이 만든 한 폭의 수채화 선연하게 피어나는 고향의 산마을 나뭇잎에 달린 은빛 물방울 속으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 물결따라 풀잎 위엔 무지개 뜬다 그 우으로 흘러오는 영원이란 음악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잡히지 않는 것들을 속삭이는 빗소리 내가 살아온 날 남은 날을 헤아려 준다 창은 맑아서 그림을 그린다

사랑/이해인

우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래고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남이란 단어가 맴돌곤 합니다. 어처구니 없이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신을 좋아한다고는 하겠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할 때면 고독이 말없이 다가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와진다는 것을.

사랑은 나무와 같다/이해인

끊임없이 물을 주어야 살아갈 수 있는게 나무이며,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다. 척박한 사막의 땅에서도 나무는 물이 있어야 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한그루의 나무는 오랜 고통과 질식을 견디어 내며 물을 기다린다. 자신의 내면에 자신이 포용할 수 있는 한계에까지 물을 담아 조금씩 조금씩 아끼고 아끼며, 하늘이 가져다 줄 물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랑은 기다림이기도 하다. 묵묵히 한줄기 비를 기다리는 사막의 나무처럼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사랑이다. 늦은 저녁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지만 작은 소반에 한 두가지 반찬을 준비하고, 행여나 밥이 식을까 보아 아래목 이불속에 밥주발을 덮어 놓은 아낙의 촛불넘어 흔들거림에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가. 한마디의 말도 필요없는 다소곳한 기다림에서 진하고 격렬한 사랑은 아니지만 잔잔하게 흐르며 조금씩 스며드는 나무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사랑은 나무와 같다. 끊임없이 물을 주어야 살 수 있는 나무와 같이 부족하지 않은 물을 주어야만 한다. 관심과 흥미라 불리우는 사랑의 물은 하루라고 쉬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루의 목마름은 하나의 시든 잎을 만드는 것과 같이 하루의 무관심은 하나의 실망을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나무와 같다. 너무많은 물을 주게되면 나무의 뿌리가 썩는 것처럼, 너무 많은 관심은 간섭이 되어 의부증이나 의처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무가 움직여 자리를 옮기면 쉽게 시들고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것 처럼 사랑의 자리를 옮기면 쉽게 시들고 쉽게 비틀거리게 되기 마련이다. 옮겨진 나무에는 더욱 많은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하 듯 옮겨진 사랑에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만 한다. 때때로 오랜 가뭄을 묵묵히 견디어 내는 나무와 같이 심한 갈증이 온다 하더라도 묵묵히 견디어 내야 할 때도 있다. 때때로 심한 바람에 온몸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깊게 뿌리내린 나무와 같이 묵묵히 견디어 내야 할 때도 있다. 오래도록 참을 수 있는 기다림과 끊임없는 관심의 두가지를 모두 가져야만 하는 나무. 그리하여 사랑은 바로 나무 같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