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섬/장 그르니에

몽블랑* 2013. 10. 1. 13:51


섬/장 그르니에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 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있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 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 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 보내고 그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거나, 무.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는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산문집을 번역했다. 그러나 전혀 결이 다른 언어로 씌어진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사람이 자기의 주위에 있는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어떤 중립적인 영역 속에 담을 쌓고 들어 앉아서 고립되거나 보호받을 수 는 있다. 그것은 즉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며 이기주의를 통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뜻이다. (중략)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 부터 자신을 벙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중략) 입을다물고 무시해 버리지는 않고 나는 마음 속에 소용돌이를 계속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 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바람에 퍼덕이는 저 깃발을 보아라, 하고 入門하려는 제자에게 티베트의 僧은 말한다. 펄럭이는 것은 그 깃발인가, 바람인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입니다.

어떤 도시를, 어떤 짐승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여자를, 어떤 친구를 사랑하는 것 -우리는 머리속으로는 이런 것을 서로 구별하려고 애쓰고, 마음속으로는 이런 것이 다 같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이런 모든 애정을 표시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 사람들이 조롱하는 묵주신공을 옹호하려고 어떤 설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기도문이야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지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표시하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마음속에서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합쳐주는 것입니다>

(이런) 비밀스러운 삶은 그러므로 반드시 부자연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런 삶은 우리들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의당 파스칼은 이런 것을 아니했다는 둥, 파스칼은 잃게 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라는 둥 떠들어대게 마련인 문학비평가와 대화를 하느니보다는 트럼프놀이를 하고 있는 미장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파스칼과 더 가까워지는 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비밀스러운 삶이 반드시 우리들을 더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 준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나는 여기서 어떤 행동의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 모든 것 중에서 특기해 둘 만큼 가장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미천하다고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다. 겁을 먹은 짐승들만이 몸을 숨긴다. 그들이 몸을 숨기는 것은 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종류의 삶은 분명 내면적으로 약한 데가 있다는 증거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자들이 육체적 단련을, 불교 신자들이 아편을, 화가가 알콜을 사용하듯이, 그럴 경우, 여행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일단 사용하고 나서 목표에 도달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데 썼던 사다리를 발로 밀어 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바다 위로 배를 타고 여행할 때의 그 멀미나던 여러 날과 기차 속에서의 불면같은 것은 잊어버린다 (자기 자신의 인식이라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한 그 무엇인가의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인시 reconnaissance>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이미 끝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특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어떤 친구가 편지하기를, 한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두시에 자기에게 정해진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려진 덧문 사이로 나무들, 하늘,포도밭, 성당등의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 -그렇게 높은 곳에 위치한 시에나시가 굽어보는 저 절묘한 들판이- 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의 방은 하나의 깜깜한 점에 불과했다) 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왜냐 하면 그것은 마음의 동요라기 보다는 정신의 동요였음이 분명하니까).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염원들, 그의 사상, 그의 마음의 무(無)를 일순간에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그 한계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 그러면서도 오직 그만이 원했었던 그 이별이 결정적인 것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식했다고 말했다.

과연 어떤 광경들, 가령 나폴리의 해안, 카프리나 시디-부-사이드의 꽃핀 테라스들은 죽음에의 끊임없는 권유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어야 마땅할 것들이 마음속에 무한한 공허를 만들어놓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명승지와 아름다운 해변에는 무덤들이 있다. 그 무덤들이 그곳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너무 젊은 나이에 자신들의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 엄청난 빛을 보고 그만 질려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1898년 - 1971년)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젊은 시절의 알베르 카뮈에게 큰 영향을 준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지중해의 영감》, 《섬》 등이 있다.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이 내 마음을  (0) 2013.10.01
죽음 직전 사람들의 '이것이 인생' 5가지  (0) 2013.10.01
뇌졸중이 온 것을 확인하는 방법  (0) 2013.10.01
고독하다는 것은/조병화  (0) 2013.10.01
복식호흡  (0) 201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