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철조망 안의 꽃

몽블랑* 2013. 10. 1. 16:40


원추리/공주 계룡산 인근(2012/07/07)

몇년전부터 내가 회원가입해서 아주 가끔 사진을 올리는 야생화사이트 인디카에서 올라온 좋은 글 한편 옮겨봅니다. 칠순이 넘은 노교수의 지극한 자연사랑과 맑고 깨끗한 그 심성을 닮고 싶습니다.

글쓴이 : 백초(白初) 김명렬(金明烈)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출판사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낸 산문집 <물 흐르고 꽃 피네>에서 글이 좋아서 이 수필집을 바로 주문했습니다.

철조망 안의 꽃/김명렬

작년에 대진(大津)에서 사는 친구 집에 가서 하루 놀고 왔다. 그 친구는 고향이 함경도 원산 근처인데, 늙어 한 발자욱이라도 고향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고 동해안의 최북단으로 이사 가서 살고 있다.

돌아오는 날 그 친구가 텃밭에서 푸성귀를 뜯어 주면서, 우리더러 갖다 기르라고 밭둑에 있던 금낭화와 원추리도 몇 뿌리 캐어서 함께 싸주었다.

주니까 가져오기는 했지만, 아파트에서 이 야생화들을 기른다는 것이 난감했다. 아무튼 실내에서는 크게 자랄 것을 대비하여 우리 집의 분 중에 가장 널찍한 오지 화분에다 심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이 되니까 하루가 다르게 자라더니 나중에는 드디어 화분이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야생에서는 다른 들풀들과 경쟁하면서 크다가 우리 집에서 화초 노릇을 하니까 마음 놓고 자란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꽃빛깔은 산바람과 밤이슬을 맞고 자란 것만 못했다. 금낭화의 진분홍색이 우리 집에서는 물 바랜 연분홍색이 되었고 그 밝은 노란색의 원추리도 빛이 죽은 주황색으로 피었다. 그런 꽃을 보니까 꼭 산새를 잡아다 새장에 가두어 놓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새 봄에는 산도 가꿀 겸, 다시 산에 갖다 심기로 작정했다.

그러고는 겨우내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경칩이 지난 어느 날 난초에 물을 주다 보니까, 아무것도 없던 그 오지 화분에서 연두색 싹이 빼죽 올라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까 원추리 싹이었다. 곧 산에 갖다 심을까했지만, 바깥 날씨는 아직도 한겨울 같았다.

며칠을 더 기다렸더니 날씨가 풀려서 모종을 할만 했는데, 그 새에 원추리는 한 6, 7 센티 정도 자라서 산에다 심으면 사람의 눈에 띌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새싹에 차마 가위를 갖다 댈 수는 없어서 그냥 갖다 심기로 했다. 금낭화도 빨긋빨긋하게 새 싹이 돋았지만 아직 눈에 띌 정도는 아니어서 함께 캐어 비닐 주머니에 넣고, 꽃삽을 챙겨 산으로 올라갔다.

막상 갖다 심으려니까 어디에다 심어야 할지가 문제였다. 궁리 끝에, 한 두어 시간쯤 올라가면 있는 “천년약수”라고 하는 약수터에 갖다 심기로 하였다. 우선 그렇게 멀리까지 오는 사람이면 산을 좋아하는 사람일 터이니까 꽃을 훼손하지 않을 성 싶었다. 또 그 곳은 사시사철 물기가 있으니 말라 죽을 염려가 없었다. 그리고 늘 사람들이 오가니까 누가 캐어 가지도 못할 것 같았다.

약수터에 도착해 보니 마침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심을 만한 곳을 찾아 주위를 살폈다. 샘에서 너무 가까운 곳은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고, 한 이삼십 미터 떨어진 개울가가 좋을 듯 했다. 가서 땅을 파 보았더니 물기도 적당했고 흙도 시꺼먼 부엽토(腐葉土)여서 잘 됐다 싶어 얼른 심었다. 심고 나서 다시 샘터로 와서 모종한 곳을 바라보니까 눈여겨보지 않는 한 원추리 싹이 보이지 않았다. 또 혹 눈에 띄었다 할지라도 길을 벗어나 일부러 개울가로 다가 가보지 않고는 그것이 원추리 싹인지를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만하면 안심해도 되겠다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그날 이후 나는 어린 아이같이 그 꽃들에 대한 갖가지 꿈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원추리는 이곳 산에서도 가끔 보았지만 덕유산 줄기에 있는 무룡산의 원추리같이 환한 빛의 것은 없었지. 그렇지만 천년약수는 광교산에서 제일가는 약수인데다가,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공기도 비교적 맑으니까 아마 밝은 빛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원추리보다 더 큰 기대를 모으는 것은 금낭화였다. “금낭화는 이 산에서 본 적이 없거든. 그러니까 그 예쁜 꽃이 피면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즐거워할 거야. 꽃이 피면 그 앞에 조그마한 패말을 세워야지. ‘이 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갖다 심은 것입니다. 훼손하지 마십시오.’라고. 그리고 옛날 오색에서 대청봉을 오를 때 설악폭포 곁에서 보고 놀랐던 그 금낭화 군락같이 많이 퍼지면 다른 샘터에도 갖다 심어야지.”

이제는 올라가서 들여다 볼 것이 있으니까 산을 더 자주 가고 싶었다. 꽃을 심고 온 다음날 당장 또 올라가서 보고 싶었지만, 너무 자주 가 보면 부정 탄다는 어렸을 적 속신(俗信)이 생각나서 자제했다. 그래서 한 사흘꾹 참고 나서 올라가 보았다. 약수터에 다다라서도 누가 눈치 챌까봐 모종 낸 쪽은 안보고 짐짓 돌아서서 약수를 한 컵 받아 천천히 마셨다.

그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는 척 하며 개울가를 살폈는데, 원추리 싹이 보이지 않았다. 다리 난간 가까지 가서 내려다보아도 안 보였다. 혹시 동물이 싹을 뜯어 먹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좌우간 내려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봤지만 역시 없었다. 원추리를 심었던 곳에 작은 구멍이 있을 뿐이었다. 얼른 금낭화를 심었던 곳을 보니 무슨 연장으로 폭 파낸 자리만 있고 금낭화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잠시 땅이 파인 곳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유리 지붕이 일시에 부서져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그 후로도 습관적으로 정해진 날에 산을 오른다. 그러나 이제는 운동하기 위해서 오를 뿐이니까 무슨 살뜰한 재미가 있겠는가? 꽃피는 철이 되었지만, 산에는 꽃이 해마다 줄어 근년에는 눈에 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요즘은 각시붓꽃이 필 때이어서 어제 산에 올라가면서 유심히 살폈지만 지금껏 매년 피던 곳에도 올해는 꽃이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능선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니,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걷는데 흘낏 보라색이 시야에 비쳤다. 철조망 안에 각시붓꽃 한 송이가 깨끗하게 피어 있는 것이었다. 반갑고 감사한 마음에 한참을 서서 바라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산길을 걸으면서 혼자 생각해 보았다. 반가운 것은 당연한데, 감사한 마음은 왜 들었을까? 물론 꽃이 거기 있어 준 것이 감사했다. 이 산을 아주 떠나지 않고 남아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평화를 선사해주니 어찌 고맙지 않은가? 그러나 내 마음 한 쪽에는 철조망이 탐욕스런 사람의 손길을 막아준 것에 대한 감사함도 있었다.

점점 피폐해가는 이 산의 자연을 조금이라도 되살리기 위해서 꽃을 심어 가꾸려던 모처럼의 시도가 좌절되자, 내 마음 속에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혐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손길을 힘으로라도 제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시도가 좌절된 것뿐인데, 나는 벌써 내 이웃에게 강압적인 수단을 쓰는 것을 은연중에 옹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폭력은 목적의 공익성으로 정당화되지 않았던가? 그 시답지 않은 작은 선행은 어느새 나를 분수를 모르는 독선과 오만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지옥으로 이끄는 길을 선의로 포장(鋪裝)되어 있다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는 서양의 격언이 생각났다.

내가 선행을 하고 있다는 자기도취는 이웃 사람들에게만 죄를 짓게 한 것이 아니다. 꽃에게도 큰 죄를 지은 것이다. 철조망 안의 꽃을 좋다고 하다니! 철조망하고 꽃같이 상반되는 두 사물이 또 있을까? 철조망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추악한 물건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허공에서도 날을 세우고 무엇이나 접근하면 해치겠다는 무한한 잔학성을 시위한다.

그러나 꽃은 자연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아닌가. 그것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잉태라는 자연의 신비까지 안고 있다. 철조망은 모든 것을 적대시하는 공격성을 전시하고 있지만, 꽃은 모든 것에게 향기와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무한한 시혜를 실천한다. 저것의 강인함에 비해 꽃은 한없이 연약하다.

그러나 꽃에는 그 무엇도 억누를 수 없는 자유의지가 있다. 포탄이 옆에서 작열하며 위협하드라도, 아무리 무서운 독재자가 피지 말라고 위협하더라도, 꽃은 필 때가 되면 핀다. 이처럼 오직 자기 자신에만(自) 말미암는(由) 것, 이것이 진정한 자유일 것이다.

그래서 철조망은 어느 한 지역에 고정되어 있어야만 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지지만, 꽃은, 특히 야생화는 아무데나 저 가고 싶은 데에 가서 핀다. 또 그래야 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자유가 없다면 야생화가 아니다. 자기의 법칙에 의해 운행하지 못하는 자연을 어찌 자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야생화에 철조망을 둘러놓는다는 것은 야생화의 본질을 박탈하는 짓이다.

그런데, 꽃을 저 안에 가두어 놓는 것이 철조망인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죽이는 것이 총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이듯, 꽃을 가둔 것은 철조망이 아니라 우리이다. 꽃은 어디에나 피지만 철조망 밖의 꽃을 우리가 모두 못 살게 하여서 철조망 안에만 남은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꽃을 그 속에 가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도 그 철조망을 따라 걷게 되었다. 다시 그 각시붓꽃이 보였다. 나는 한번 눈길을 주고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철조망 안의 꽃을 보고 감사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부끄러워 할 이유만 있었다.

금낭화/대아수목원 금낭화 자연군락지에서(201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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